<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혁명 이론, 상징, 개인의 인식론적 전환, 대중 그리고 개인

이 영화를 볼대 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기사 한 줄 읽어보지 못한 채 이 영화를 보게 됐다. 브이의 희극적 등장에는 이 영화가 코미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 빠져 들어갔고 감독이 주려고 하는 메시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말미에는 잘 다듬어진 논리학 책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영화는 사회주의 이론, 혹은 혁명 이론 그리고 현대의 모든 모멘텀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비와 브이의 만남

여기서 이비는 부모가 전부에 의해 살해되는 어린시절을 경험하고 비판의식과 정의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간직한 노동자 혹은 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마스크를 한 브이, 혹은 마스크 그 자체, 아니면 브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스크다. 그는 익명성의 상징이다. 감독은 어떤 사람도 브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만약 감독이 브이의 마스크를 벗겨내고 애초에 씌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존재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부여했다면 이 영화는 테러리즘에 대한 색다른 해석 정도로 그에 적당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브이에게 마스크를 씌었고 브이는 갑자기 어떤 영웅이나 아이덴티티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대중 그 자체가 되고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아무나가 된다. 마스크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가 행하는 어떤 사건도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대중의 이름으로 그 익명성으로 대중과 더불어 일반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사실 어떤 테러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감독은 브이에게 이이덴티티를 부여하지 않기 위하여 그에 대한 정말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브이는 그냥 대중이 된다.

여기서 이비와 브이의 만남이 절묘하다. 감독은 브이가 탄생하는 과정을 이비를 통해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비는 브이를 통해서 고통을 배우고 그리고 고통을 이기는 법을 배운다. 이비는 대중에게서 그것을 배운다고 해도 좋겠다. 삭발을 당하면서 이비는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투사로 거듭나게 된다.
영화의 뒷부분에 수많은 브이가 모이는 장면은 상징성으로 가득 차있다. 수많은 브이가 의사당 앞에 모인다. 경찰도 진압을 포기한다. 불꽃놀이가 승리를 축하한다. 전체주의와 공포주의에 대한 대중의 승리이다. 이장면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수 많은 브이들이 가면을 벗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익명성 뒤에 숨어있다가 가면을 벗고 당당히 하늘을 보는 모습은 이비가 삭발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완전히 결합하고 있다. 이비는 대중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자각한 개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브이는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더욱 발전하고 성장한 수많은 개인으로 태어난다. 브이는 이비고 대중이고 개인이다.


그 밖의 이야기들.

이성의 시대에 비이성이 격리되고 제거되는 과정.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동성애를 소재로 하여 잠시 보게 된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격리되고 버림받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고뇌가 그려진다. 감독의 고민은 실제 남들과 다른 이들이지만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뇌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남들과 다른 것을 밝히는 용기를 가졌으므로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인간,

정부로부터 살해되는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는 이비가 익명성 뒤에 숨는 것, 약한 개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투사로 성장하는 과정, 브이가 익명성을 버리고 마스크를 벗는 과정은 하나의 잘 다듬어진 듀엣연주이다. 결국 모두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의 공간은 어디였을까?

 

대부분의 예술 영화나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영화는 아이러니하게 가장 대중들이 외면하는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서 주는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향해져 있지만 대중들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사그라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마리 토끼를 거의 잡은 듯이 보인다. 대중이 열광하는 요소는 영웅주의와 낭만주의의 적절한 혼합물 인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적어도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약간의 암호화를 통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적어도 적당한 재미를 섞어놓는데 성공한 것 같다. 역시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데 동의하게 된다.

전체주의의 공포 대신에 자본주의의 교묘함을 표현하고 싶어했을 감독은 적어도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영화 속에 굉장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는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테러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영화를 잘못 본 것이다.

 

2006.3.23 

by 귀검 | 2006/03/23 00:26 | Dream | 트랙백(1) | 덧글(2)

너무 많아. 내가 사고 싶은건.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마케팅, 복합계 이론 등등 어떻게 보면 그것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 같다. 종종 과학의 발전으로 발명된 갖가지 기구나 제도 등은 사회주의적으로 혹은 인류의 평등을 구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제공해왔다. 인터넷도 좋은 예이다. 아무나 어디서든 (익명으로) 얘기할 수 있다. 이것만큼 평등한 것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결과는 어떤가? 인터넷기술, 네트워크기술, 유비쿼터스와 결합한 마케팅 등은 사람들을 더욱 완벽히 물샐틈없이 통제하는데 이바지 한다. 감성적이고 즉각적인 마케팅, 즉각적인 구매, 즉각적이고 장소의 제약이 없는 광고. 어디서나 상품을 사야 한다는 유혹, 너무나 많은 상품, 이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로 역할을 한다. 새삼 네그리나 그 전에 루카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집이건 직장이건 (이제는 산속에서까지) 상품, 이데올로기적 광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 오래된 일이기도 하다. –

국가의 영역을 벗어난 자본의 제국에 대한 전세계 노동자의 자발적 운동에 대한 얘기를 해도 그걸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여도 한 개인이 선택할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는 상품들이 있는가? 오늘도 나는 PDA폰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는다. 물론 아무도 내게 이것을 사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by 귀검 | 2005/10/13 10:42 | ETC | 트랙백 | 덧글(0)

열링우리당, 다시 줄을 서야한다.

무국적적인 자본의 흐름은 세계를 재편하고 신보수주의를 만들어내고 국제화를 선도했다. 무츄얼 펀드, 헤지펀드로 대변되는 이런 순수하지 만은 않은 힘들이 구체화되어서 세계를 재편하고 있다. 재벌은 더 커지고 새로운 대자본가가 만들어지고 노동자 계급과 산업예비군(실업자)들은 무수히 양산된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중산층이 몰락해 간다는 것이며 이미 많은 중산층이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했다. 이것을 수행한 주체는 역사이며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그리고 그 총대는 IMF가 맨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가장 법규위반을 잘하는 사람들, 혹은 가장 불로소득이 많은 몇몇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사람들의 힘의 본원이 한나라당이다. 그들만의 당이다. 정부가 말하는 2%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투기꾼과 사기꾼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사람들인 거다. 이 사람들의 바램대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분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반 대중들의 또 다른 부분을 대변하는 정권이 나왔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심각한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중산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고 – 중산층의 특징은 시장경제 옹호론과 계급상승의 본능이다. - 중산층의 몰락이 지지율을 20%대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현상적으로는 그 과정을 전담하고 있긴 하지만 정부가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상의 본질은 지지해줄 계층이 몰락하고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지지율이 이토록 낮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다. 노무현 개인의 덕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전략가 전술의 부재 등등 그러나 그 같은 이유 저편의 본질적인 문제는 정부가 대변할 주체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부동산 정책은 성공적인 중산층을 위한 정책이다. 그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몰락해가고 있는 중산층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노무현 정부가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선 자신을 지지해줄 중산층을 신속히(?)만들어내든지 아니면 다시 줄서기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몰락한 중산층은 가진 것 없는 노동자계급이 된다. 그들이 아직 제대로 결집하지 못했지만 민노당의 세력이 훨씬 커질 것 이라고 예측을 한다면 대충 맞아 들어갈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제 줄서기를 다시 해야 할 때이다.

by 귀검 | 2005/09/29 16:05 | Darkside | 트랙백 | 덧글(0)

망가진 저널리즘

언론의 문제는 대중의 문제이다. 따라서 대중들에 대한 교육과 정치, 문화전반의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 동이 하고 있는 짓은 꽤나 비열해서 객관적인 눈이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것도 언론인가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조, 동의 사설을 보고 통쾌하다라고 반색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단지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진영의 몇몇 사람의 정신착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 오해이며 앞에서 힘의 문제를 언급할 때 얘기했듯이 무지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조선과 동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힘을 무시하지 말랬지?” 자신이 밀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기상천외한 일 혹은 거의 천재지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너무 분한 거 같다고 느끼는 것 같다. 편집진들도 윗사람의 생각을 너무도 잘 읽어낸다. 편집방향은 거의 방씨 일가의 생각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도 같다. 한마디로 손발이 척척 맞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단지 방씨일가와 그 떨거지들 몇몇의 개인적인 문제일까? 언론기구는 대중을 교화하고 호도하고 여론을 만들어간다. 이번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 혹은 각종 법안이나 개혁안에 대해서 분명히 실익이 돌아가는 중산층조차도 소위 사회지도층 혹은 무법자들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 단지 무지의 소치라고 말하기엔 미흡한 감이 있는 것이다. 결국 대중의 생각을 자기네 생각들로 도배한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by 귀검 | 2005/09/29 10:58 | Darkside | 트랙백 | 덧글(0)

아마추어라고 봐달라고 하지 말라.

열린우리당의 아마추어리즘은 확실이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그들은 알아야 한다.

한나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우익진영이 30년간 정권을 가졌던 커리어는 지금의 인력 풀을 만들었고 학벌주의와 관료주의로 무장된 그 인력풀이 관료를 형성해왔다. 관료들이라고 싸잡아 얘기했지만 그들의 직업과 계급적 지위는 다양하다. 행정직은 물론이고 변호사, 기자, 교수등 정부 관료로의 이직이 비교적 빈번하게 일어나는 직업군이 그것이다. 몇몇 제정신이 있는 변호사 교수들을 제회한다면 그들의 계급적 지위는 기존의 체제와 보수 우익의 수혜를 등에 업고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들의 수혜에는 적절한 보답이 필요했고 또 그렇게 되어 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관료들이 대한민국의 독재정권의 손발이 되어왔다는 이 사실은 정치적 역관계를 불공평하게 만든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나라 당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망령들이 가진 이러한 경험치는 적어도 현재로선 열린 우리당이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무능력과 아마추어리즘이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국가에 대한 혹은 다시말 하면 힘에 대한 인식이 수준 이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권의 재창출은 인기도에서 나올지 모르지만 그 근원은 그 정권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에 있으며 그 힘의 핵과 그 주변의 갖가지 기구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잘 결합되어 있는 것도 30년 동안 해먹을 수 있던 이유도 본능적으로(이론은 전무하므로) 그 힘 관계와 그 힘의 핵심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세력은 정보에 대한 독점과 그 정보로 인력 풀을 확대 재생산해왔으며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과 집단들을 효과적으로 고립시켜왔다.. 관료계급과 언론과 관변단체를 이용한 선거전은 결국 공평한 선거와는 영원이 이별하게 만들었다.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군대들을 보라. 그들이 장악하는 것은 정부기구와 언론이다. 머리는 나쁘지만 힘에 대한 감각이 있는 집단이라서일까?
노무현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이런 어렵지도 않은 힘 관계에 대한 통찰이 있었다면 국정원을 보호하고 오래 전에 조, 동과 관변단체를 고립하거나 해체했어야 옳았다. 어찌보면 비민주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평등이 없는 것처럼 정권의 창출과 유지에는 무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전략과 전술은 필요하며 이런 아마츄어리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믿음 – 특히 대중에 대한 – 은 결국 보수진영에 정권을 갖다 바칠거고 그 결과는 지금보다 더 참혹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청와대의 이론 없는 개혁의지는 결국 힘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 국민들이 그 지속성을 불신하게 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당은 전략이 없고 대통령은 고립감을 느끼고 연정론이라는 이상한 형태의 전술을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주도권을 잃어버렸음을 뜻한다. 지역구도타파라는 이슈를 부각시키는데 실패한 열린우리당을 한마디로 무능력하다라고 말하면 오해일까?

by 귀검 | 2005/09/16 13:46 | Darkside | 트랙백(3) | 덧글(1)

무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우리가 정말 외롭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외로움의 벽을 깨려고 한평생 노력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벽들로 인해 질식해 죽는 경우도 있는데 그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by 귀검 | 2004/12/13 02:15 | ETC | 트랙백 | 덧글(0)

무제


내 맘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 홀로 가려 하는데
철없는 그 아이 같이 가자고 조르네.

2004.9.24

by 귀검 | 2004/09/24 08:10 | ETC | 트랙백 | 덧글(0)

꿈1



안개 자욱한 산 길을 걸을 때의 모든 소리는 어떤 공명이 있다. 풀이 스치는, 바위를 밟을 때, 혹은 자갈이 무너지는 소리는 사람없는 욕실의 목소리처럼 떨려 나온다.
무엇보다 나와 그녀가 헐떡이는 소리는 좋은 섹스 후의 합쳐진 숨소리처럼 들린다. 난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산 길을 오른다. 내 온몸이 그 숨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다. 안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머리카락은 그녀의 작은 머리와 얼굴에 선을 그린 듯 붙어 있다. 안개는 내 얼굴을 핱고 내 온 몸을 적신다. 내 들숨으로 안개가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가슴처럼 생긴 오똑한 봉오리들을 그녀는 잘도 탄다. 안개에 젖은 초록은 목욕 후의 나신처럼 싱싱하다. 녹색의 젖가슴은 그녀를 품고 또 나를 품는다. 안개는 녹색의 젖가슴도, 그녀도, 또 나도 적시고 우리는 하나가 된다. 안개는 산이고 산은 안개고 그녀도 안개이다. 난 그녀의 숨소리의 파고를 즐긴다. 난 안개가 된다.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이 아득한 산길을 걷는다.

2004-07-07

by 귀검 | 2004/07/07 02:07 | ETC | 트랙백 | 덧글(0)

내 벗에 가까이 가는 방법


이미 저만치 가있는 친구에게
기다려 달라고 외치지 않기.
그리하여 상큼한 산속을 달리듯 걷는 벗에게
나를 뒤돌아 보지 않게 하기

내 그리움을 내색하지 않기

어두운 산길을 아무 말 않고 걷기.
내속의 외로움을 벗에게 들키지 않기.
그리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한 친구되기.

내 어둠을 친구에게 드리우지 않기.

내 벗의 외로움을 못본척하기
그리하여 내 벗의 외로움을 산 속에 잠재우기.
결국은 같은 보폭으로 그 흙길을 걸어가기.

2004.06.25

by 귀검 | 2004/06/25 02:04 | ETC | 트랙백 | 덧글(0)

인생의 진액을 핥아라 - 어슐러 K. 르귄의 소설 『빼앗긴 자들』을 읽고

얼마 전에 읽은 어느 SF소설에 인간의 삶의 진정한 상황(현실)이 고통이냐 사랑이냐를 놓고 토론하는 장면이 있다. 짧은 대화였지만 기억에 남아 맴돈다.
새삼스레 세월을 곱씹어 되돌아 본다. 고통스런 80년대의 외롭고 긴 터널을 지나 횡 하니 뚫린 가슴만 남았다. 90년대를 회의와 반추로 살았고 새 천년의 시작을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과거를 호흡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를 연민을 가지고 본다. 고통으로 얼룩진 내 가슴의 상처들…… 게 중에는 이미 아물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부터 결코 아물지 못할 것같은  깊은 상처도 있다.정말 그러고 보니 가장 확실한 삶의 징표는 이런 고통이 아닌가 한다. 사회에 부적응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어떤 때에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거대한 사회라는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고통은 내 삶의 뿌리이자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다. 누군가는 고통이 서 있는 자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측은지심이나 다른 가치로운 어떤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겠지만 고통만큼 내 삶을 지속적으로 각인시키고 꿰뚫어 온 것은 없었다.

철들기 전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없어서 울던 기억만 생생하고 커서는 철학적 방황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내 머리 속이 그리도 고통스러웠으며 사랑이라는 기막힌 감정을 경험하면 반드시 그 사랑의 그림자도 알았다. 상실감, 배신, 질투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괴물의 친구였고 고통의 화신이었다. 공안분실에 끌려가선 몇 날이고 취조를 받다 거기서 바로 군에 끌려가던 날이 생각이 난다. 부모님을 5분간 면회하고 밤새 긴 철로를 달리던 그 날의 기차간. 그 날의 망연자실과 고통. 세월이 흘러 어느 듯 반추할 것이 많아지면 주눅과 두려움이 어느덧 내 가슴을 파고 들어 공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 삶은 고통스럽다. 사랑이나 정의나 행복이나 그 어떤 고상한 단어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고통은 가장 진실한 삶의 징표이다.

 

고통은 상실감이나 빈곤함에 주는 선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은 모든 고통의 어머니다. 매맞는 아내부터 점심 굶는 아이들까지, 오랜 세월을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한 미국 내 유색인종이나, 가지지 못한 우리나라의 기업을 분해하여 팔아 치우는 헤지펀드의 자본의 논리 등도 모두 제 각각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이름 아래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이미 내 동공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이제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알고 싶다. 진정으로. 몇 백 만년을 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인류가 살아온 과정 전체가 거짓과 위선이 아니라면 그래서 고통밖에 없는 이 삶을 포기 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이 사회를 살아갈 동력이 고갈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인지 아니면 내가 지구라는 별에 떨어져 스스로 외계인인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나만 가지는 외계인다운 생각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쯤에 내가 서있는지 알고 싶다. 진정으로 알고 싶다. 그래도 인류가 생존해 있는 걸 보면 고통 이외에 어떤 의미를 찾아 내는 데 성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지 고민했던 까뮈 같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느 모퉁이에서 틀린 길로 접어들었는지 알고 싶다. 돌아갈 수 있다면 나 혼자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어찌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고통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알고 싶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난 고통의 자리를 대신하여 삶을 찬미할 어떤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인류의 가슴과 역사에도 지속적으로 남겨놓은 고통의 상처는 아직 아물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초토화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하는 자들과 그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유년기를 채 지나지 못한 이 현재의 시간을 인류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며 가슴졸이며 회상 할 미래의 인류를 생각해 본다. 그 때에도 살아남을 인류는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건강할 것이며 21세기 어느 순간 자멸 할 뻔한 어리석음을 반성할 것이리라.
어느 철학자가 지금의 인류를 아직 소유와 탐욕의 본능에 벗어나지 못한 반인(半人)이라고 불렀던 것이 기억이 난다.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 탐욕에 번들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닦을 줄 모르는 미국은 내가 경험했던 한 푼의 고통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는 씻지 못할 고통의 기억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파병은 이 부끄러운 전쟁에 우리가 가해자로 나서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주는 쪽에 서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우리가 반인(半人)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은 인류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인 듯하다. 쉐벡 의 말처럼 고통은 삶의 진정한 상황이며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징표인 것 같다. 생존 의지를 기각(棄却)하는 것만이 삶의 고통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컬트주의(?)적 생각은 고통을 잘 이기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그가 예전에 찾다 결국 찾지 못한 고통이라는 단어를 대신 할, 그리고 나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찾아 헤매는 그 어떤 것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적어도 당분간은.

by 귀검 | 2004/05/13 01:54 | Drea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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